

2025년 '올해의 음악인'을 포함해 한국대중음악상 4회 수상을 기록한 싱어송라이터 이승윤. 그의 네 번째 정규 앨범은 이전처럼 문학적인 언어 대신 짐짓 간단한 '0집'을 제목으로 달고 나왔습니다. 새 앨범은 원점을 돌아보겠다는 속뜻처럼 이승윤을 세상에 알린 프로그램 '싱어게인 – 무명가수전'과 2021년 정식 데뷔 음반 '폐허가 된다 해도'보다 앞선 이야기를 다루고 있죠. 한동안 제대로 들을 수 없었던 2016년 솔로 정규 앨범 타이틀곡 '무얼 훔치지'를 비롯해 EP '달이 참 예쁘다고'와 '새벽이 빌려준 마음', 그리고 그가 일원으로 있었던 밴드 알라리깡숑의 음악까지 수록한 이 작품은 가히 이승윤 세계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승윤은 미완의 상태로 남겨둔 음악을 전면 재녹음을 거쳐 비로소 완성했습니다. 그 시절 함께한 동료들의 목소리와 흔적은 여전히 곳곳에 묻어 있죠. 이렇게 완성된 '0집'은 가장 그다운 방식으로 지난 10년을 기념합니다. 아티스트가 직접 전하는 트랙별 코멘트와 함께 '0집'을 감상해보세요. [PART 1.] 1. 그림자 위로 수백 년이 되었다는 나무를 보다가 그 그림자 아래 있는 들풀과 들꽃은 무슨 대화를 할까 생각했다. 마치 내 모습 같았다. 서로의 곁에 서로가 심어진 게 다행이면 좋겠다. 마치 저 거대한 그림자를 벗어날 것처럼, 그 그림자 속에서 한껏 살아내면 좋겠다. 그게 시건방이든 꿈이든. 아마 멋지게 해낼 거야 분명. 2. 하품만 나오네 이제는 무언갈 보여줄 테다. 너의 하늘을 보다 멋지고 아름다운 색으로 물들여줄 테다. 맹세코 기필코 진짜라고. 근데 왜 이렇게 하품만 나오는지 모르겠다. 3. 이백서른두번째 다짐 너무 거창한 말과 계획들뿐이라 이백서른두번째 다짐만 하고 있다. 하루와 시간과 순간들에게는 송구하기만 할 뿐. 이젠 사과하자. 숨을 쉬고 내뱉고 그렇게 하나씩 해보는 거야. 4. 반역가들 모든 걸 알 수 없고 모든 걸 보여줄 수 없고, 모든 걸 알고 싶지 않고, 모든 걸 보여주고 싶지 않은 우린 검증받지 않은 번역가들이자, 진실할 수 없는 반역가들이지. 이해하고 싶고 이해받고 싶다. 5. 오늘도 삼키면 끝나는 하루들. 삼키기 힘든 하루들. 삼켜 본 적도 없는 하루들이 너를 울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도 네가 울고 싶을 땐 울었으면 좋겠다. 부디 오늘 하루 네가 힘내면 좋겠다. 언젠가 이 모든 것들을 다 삼키고 소화해 낼 날이 오면 좋겠다. 아니 그렇게 믿기로 했다. 6. 가끔은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고, 가끔은 그리운 한숨을 쉬게 하는, 한때 전부라고 여겼던 것들에게 7. 천문학자는 아니지만 있잖아 별이란 건 빛을 품어내고서 뿜어내는 돌멩이를 말한대. 그럼 말야 아침을 오롯이 끌어안은 조약돌도 별이라고 부를까. 오 나는 천문학자는 아니지만 너의 눈동자에 떠 있는 별빛들을 주머니에 넣어둘 거야. 8. 어버버버 결국 하고 싶은 말은 단순한 건데 생각보다 그리 쉽지는 않은 거야. 그저 예쁜 말을 네게 주고 싶었던 건데 이렇게 어버버버 하기만 하는 거야. 9. 들려주고 싶었던 못다 핀 꽃이 뒤덮인 어지러운 꿈속에서도, 엉켜있는 가시넝쿨 속에서도, 기어코 피워낸 네게 들려주고 싶었던 말이야. 10. 푸념 언제쯤 넘어지지 않을까요, 언제쯤 무던해질까요, 언제쯤 세상을 알게 될까요, 언제까지 목소리는 메아리만 칠까요 11. 지식보다 거대한 우주에는 의지는 선택일까요, 선택이 의지인 걸까요, 아니면 그 무엇도 아닌 걸까요. 하나를 알게 되면 열 개를 모르게 되는 거대한 우주 속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 내가 될 수 있을까요. 12. 무얼 훔치지 언젠가 노을을 보며 언덕이 태양을 훔치는 것 같다고 느꼈다. 샘이 났다. 그런데 그 언덕을 애써 올라도 태양은 사실 또 멀찍이 있겠지. 언젠가 우리는 수많은 세계를 훔쳐 와 덕지덕지 기워내어 나라는 세계로 우기며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작 정말 되고 싶은 나는 또 언제나 멀찍이 있겠지. 부끄럽지만 영화 같은 시련 하나 없이도 포기하고 싶을 때가 참으로 많았다. 그럴 때는 대체 무얼 훔쳐야 이 삶을 계속 기워낼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럼에도 이건 나를 살아가게 하는 것에 관한 노래다. 하지만 그게 무언지 나는 여전히 모른다. [PART 2.] 1. 뒤척이는 너울 새로운 파트를 시작하기 위해 저 멀리서 뒤척이며 밀려오는 너울 같은 2. 게인 주의 우린 은하만 한 게인이야 그리고 이건 날개 모양의 노래야 3. 가짜 꿈 우리가 꾸고 있는 것이 가짜 꿈이래도 상관없어 우리는 여기에 분명히 있고 여기에 살아 있어 그리고 이제 우리가 나갈 차례야 4. 무명성 지구인 이름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무명이라는 말에 욱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름이 있는데 없다고 하다니. 이름이 있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수는 없을까. 젊음과 희망이라는 빚더미에 앉아 무명실로 무언갈 기워가는데 그게 무언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5. 우주 like 섬띵 투 드링크 구원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고 세상이 구와 원으로 이뤄져 있는지 뭔지 모르겠고 나는 그저 삐뚜루 서 있는 마름모인 것 같아. 나는 우주라는 구와 원을 그냥 다 들이켜버릴래 6. 빗 속에서 눈물겹게 어려운 일이지만 눈물 앞에서 빛을 말하는 사람보다 비가 되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7. 정말 다행이군 햇살과 눈싸움이나 하는 나를 보고 웃어주고 함께 툴툴거려주는 네가 있어 정말 다행이야 8.관광지 사람들 우린 관람객으로만 살고 있는 걸까, 우린 관광지가 되기 위해서 살고 있는 걸까, 우린 관광지를 떠받들기 위해서 살고 있는 걸까. 우린 지금을 지금으로 대하며 살고 있는 걸까 9. 새벽이 빌려 준 마음 나는 자꾸만 새벽이 빌려준 마음을 꼭 쥐어 든 채 하루 전체를 살고 있나 보다 10. 구겨진 하루를 자꾸만 하루가 구겨진다. 아니 내가 구겨버린다. 매일 밤 구겨진 하루를 다리다가 밤을 지새우는 것 같다 11. 뒤척이는 허울 허울뿐인 경구들, 허울뿐인 왕관들, 뒤척이는 허울들의 세상에서 눈 감아 휘청이는 건 좀 봐주세요 12. 없을걸 우리의 노래를 굳이 들어줄 필요는 없어 물론 따라 부르고 싶으면 얼마든지 따라 불러도 돼. 13. 날아가자 우리 도시 한 가운데 파란 호수를 만들어 보자. 나는 노래들을 너는 춤 외엔 챙길 거 없어. 날아가자 14. 새롭게 쓰고 싶어 자꾸 접고 적고 접고 적었던 이야기를 이제는 펼치고 싶어. 낡은 공책 안에 적어 놓은 낡은 이야기를 너와 새롭게 쓰고 싶어 15. 허튼소리 허튼소리는 사랑의 다른 말일지 몰라 16. 굳이 진부하자면 진부하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서 어려운 말만 했는지 몰라. 특별하게 말하고 싶어서 빙빙 돌렸는지도 몰라. 그러다 보니 편지 한 장도 종일 쓰게 되는 것 같아. 사실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굳이 진부하자면 사랑해 널 17. 달이 참 예쁘다고 영원히 노를 저을 순 없지만 몇 분짜리 노랠 지을 수 있어서 수만 광년의 일렁임을 거두어 지금을 네게 들려줄 거야 달이 참 예쁘다고